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카낭의 비극 (문단 편집) == 사건 이전 == [[제2차 세계 대전]]으로 인해 12년 만에야 다시 열리게 된 [[FIFA 월드컵]]에서 개최권을 따낸 브라질은 첫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다[* 브라질이 첫 월드컵 우승의 감격을 누린 때는 [[1958 FIFA 월드컵 스웨덴|1958년 스웨덴 대회]]에서였다.]. 지역 예선이 시작되기 전 [[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|아르헨티나]]가 기권했다. 당시 아르헨티나는 [[CONMEBOL 코파 아메리카]]에서 3연패(1945~1947년)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강팀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르헨티나가 기권했다는 것은 난적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.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호재였다. 사실 [[아르헨티나]]는 원래 1946년 월드컵 개최자격을 따냈으나 2차 대전 전후복구하느라 아무도 참가신청을 하지 않아서 대회가 취소가 되었다. 그래서 다음 대회 개최권을 주겠노라고 [[FIFA]]에서 약속했으나 이후 FIFA는 약속을 깨고 1950년 월드컵 개최권을 투표해서 브라질이 따내게 되었다. 아르헨티나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월드컵은 물론 그 다음 월드컵인 [[1954 FIFA 월드컵 스위스|1954년 스위스 월드컵]]까지 기권해 버렸다. 단, 아르헨티나가 다시 진출한 [[1958 FIFA 월드컵 스웨덴|1958년 스웨덴 월드컵]]에서 아르헨티나는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여 대회 13등으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. 그렇게 아르헨티나가 빠진 상태와 동시에 [[6.25 전쟁]]도 발생된 상태에서 시작된 월드컵 본선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치렀다. FIFA와 브라질 월드컵 조직 위원회는 경기수익을 한 푼이라도 더 뽑아먹기 위해, 모든 경기를 8강도, 토너먼트도 없이 조별리그로 바꿨으며 그 조별리그에는 총 4개 조 16개 팀이 참가하는 걸로 했다. 하지만 우루과이가 속한 조를 비롯한 두 개의 조에서 기권팀이 연거푸 발생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13개 팀이 13강 조별리그를 치렀다. 그리고 8강전이 없이 조 1위 4강 결승리그 진출제도로 진행되었다. 개최국 자격으로 1조에 배정된 브라질은 개막전을 [[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|멕시코]]와 치르고 그 다음은 [[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|스위스]], 마지막으로 [[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|유고슬라비아]]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. 아니나 다를까, 멕시코를 4:0으로 크게 꺾고 스위스와는 2:2로 비겼지만 유고슬라비아를 2:0으로 꺾으며 조 1위로 당당하게 최종 리그에 진출하였다. 옆의 2조는 껄끄러운 상대로 여겨졌던 [[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|잉글랜드]]가 [[미국 축구 국가대표팀|미국]]에 0:1로 덜미를 잡히는 이변이 일어났다. 원래 미국 팀은 [[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|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]]에서 준결승에 진출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팀이었지만, 이 월드컵에서 미국은 원래 출전할 예정이었던 선수들이 [[2차 대전]]과 [[6.25 전쟁]]에 죄다 [[징집]]당해서 그 빈 자리를 [[불법체류자]], [[유학생]]들로 대충 메워서 급조된 어중이떠중이 팀이었다. 즉, 네임밸류만 있었지 내용물은 부실한 팀이었다. 그런 팀한테 축구 종주국의 세계 최정예 멤버로 구성된 잉글랜드가 뜻밖의 일격을 먹은 것이다.[* 경기가 끝나고 한 [[잉글랜드]] 신문사는 현지에서 날아온 '잉글랜드 0:1 미국' 메시지를 멋대로 '탈자가 났군?' 하고 생각하고는 <잉글랜드 10:1 미국>으로 [[오보]]했다가 망신을 산 해프닝까지 있었다.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 전술, 기술적인 면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했다. 종주국이었고 세계 축구의 틀을 만든 국가니 어찌보면 당연했다. 1930년대 [[아스날 FC]]의 [[허버트 채프먼]] 감독이 만든 WM전술은 40년대, 50년대도 세계를 지배했고, 초반의 잉글랜드는 월드컵 같이 수준이 낮은 대회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며 불참했다. 실제로 세계 최초 월드컵 연속 우승국가인 이탈리아를 영국에 [[하이버리의 전투|초청해서 격파했다.]] 그 뒤 세계 축구를 무시하던 잉글랜드의 자존심은 1949년 [[웸블리 스타디움]]에서 [[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|아일랜드]]에게 0:2로 덜미를 잡히고 1950년 월드컵에서 미국한테 0:1로 패배, 1953년과 1954년에도 그 [[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|매직 마자르]]를 웸블리로 초대해 치룬 세기의 대결(Century of the Match)에서 3:6이라는 더블 스코어로 박살나고, 복수한다고 [[헝가리]]로 원정을 갔다가 1:7로 박살나면서 산산조각난다. 게다가 잉글랜드는 [[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|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]] 우승 이후 한번도 월드컵을 포함한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한 적이 없다.] 결승골을 넣은 [[조 게이젠스]]는 [[미국]] 국적조차 취득하지 못한 [[아이티]] 출신 일개 유학생이었지만, 이 득점 하나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되었다. 그 여파로 잉글랜드는 [[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|스페인]]에도 털리며 8등으로 탈락하여 4강 결승리그 진출권을 스페인에 내줘야만 했으며 3조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이탈리아]]가 1949년에 있었던 [[수페르가의 비극]]으로 인해 국대 전력이 누수된 탓에 [[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|스웨덴]]에게 2:3으로 덜미를 잡혀 광탈해 버렸다.[* 이탈리아는 이로부터 [[2018 FIFA 월드컵 러시아|68년 후]], [[2018 FIFA 월드컵 러시아/지역예선(유럽)/플레이오프/스웨덴 vs 이탈리아|러시아 월드컵 본선진출권을 놓고 가진 플옵경기에서 또다시 리타이어 당했다.]]] 단지 4조의 우루과이가 [[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|볼리비아]]를 8:0으로 캐관광시키고 올라갔을 뿐이다. 왜냐하면 [[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|스코틀랜드]], [[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|터키]]가 일찌감치 기권했고 바통을 넘겨받은 [[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|프랑스]], [[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|포르투갈]], [[인도 축구 국가대표팀|인도]]까지 줄줄이 기권했기 때문이다. 이 외에도 당시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|서독]]과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/사라진 팀#s-2|동독]]은 추축국으로 2차 대전을 일으킨 책임 징계가 있었기 때문에 진출이 불가능했다.[* 마찬가지로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는 1943년에 일찍 항복하여 연합국에 가담하였기에 패전국이 아니라 특수지위국 지위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. 즉 이탈리아는 통념과는 달리 의외로 패전국이 아니다.] 해서 우루과이는 사실상 부전승으로 결선리그에 올라간 것이다. 이러니 브라질 입장에서 남아 있는 난적이라고는 우루과이 하나 밖에 없었으며, 월드컵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기 시작한다. 4강 결승리그 첫 경기는 [[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|스웨덴]]과 치르고 그 다음은 [[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|스페인]],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. 브라질은 스웨덴을 상대로 7:1 대승을 거두고, 스페인을 상대로 역시 6:1 대승을 거둔다. 그러는 동안 우루과이는 스페인을 상대로 2:2로 [[무재배]]를 하더니, 스웨덴을 상대로는 선제골을 얻어맞고 엄청나게 고전하다가 3:2로 겨우 역전승을 거두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